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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시간_(8) 남자의 차를 타고 약속된 한정식 집으로 가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다. 오전에 봤던 그 같은 벚나무를 보며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꽃망울이 그새 힘을 털썩 풀어놓은 것처럼 조금 더 벌어져 보였다. 나도 같이 힘일 털썩 하고 풀렸다.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실소가 나왔다. 나는 분명히 남자를 사랑하는데, 8시간 전까지 확신을 갖고 있던 이 마음이 8시간동안 빠른 속도로 닫혀 버리는, 한여름, 한낮에 내놓은 김밥이 반나절을 못 버티고 쉬어버려 꼭두새벽 김밥 싸는 어미의 정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는 내 마음이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 사랑해요 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개인블로그에 털어놓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별거 없는 감정이 되다니.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한 공포와 스스로.. 더보기
48시간_(7) 마냥 안쓰러웠던 예전의 감정과는 달리, 나와의 자식을 원치 않는 남자로 인해 이미 내 마음이 지옥인데 나와는 상관도 없는 남자의 자식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주고자 예쁜 유치원생들을 보면서도 예쁘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남자를 위해 자꾸 무언가를 참아야만 하는 나의 애쓰는 마음이 버거워지고 어느덧 남자를 향한 원망과 자책이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우리는 끝 인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끝을 낼 수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그만 하자 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고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내가 1년이 넘게 만나온 이 남자는, 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본인의 처지를 까닭 없이 미안해하며 나를 놓을 테지만 그렇게 남자가 나를 완전히 놓았을 때 내가 정말 상처를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 더보기
48시간_(6) 얼굴도 모르는 나의 부모님에 대한 찬사가 끝나자 갑자기 남자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결혼이후 주욱, 이혼을 하고는 좀 더 금액을 올려서 부모님께 한달에 30에서 40정도 용돈을 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덧붙여서 용돈은 양가 부모에 똑같이 드릴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강조했다. “이백 남짓 생활비에 양가 부모님 생활비를 드리면 최저급여 수준인건데... 부모님이 얼마나 힘드신건데? 어디 아프셔? ” 남자는 나에게 외동아들만 바라보면서 국민연금 외에는 소득이 없으신 부모님을 져버릴 순 없다고 했다.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데 더 할 말도 없었다. 평소에 먼저 연락도 거의 안하고, 살갑지도 않은 딸이지만 갑자기 내 부모의 실망 가득히 일그러진 얼굴을 생각하자.. 더보기
48시간_(5) 나도 꼭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이를 유달리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허나 아이 없는 딩크족으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니 내가 좋아하는 그의 몇몇 부분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독신의 삶을 유지한다면 모를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자연스럽게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의 아이를 거부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나와는...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남자가 전처와 낳은 자식의 부양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다는...뭐 그런...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을 제시하다가니...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지 스스로 어이가 없네. 혹시나.. 더보기
48시간_(4) 모처럼 평일에 남자와 내가 회사에서 휴가를 맞춰서 냈다. 벚나무 꽂망울이 작고 단단한 강원도의 옥수수 강냉이처럼 막 맺히기 시작해서 그 여린 것 같으면서도 힘있게 알알이 박혀 있는 작고 단단한 꽃망울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가슴 설레던 날이었다. 남자와 나는 일찍부터 서울 근교에 위치한 이제 막 오픈한 브런치 카페에 갔다. 좀 더 자세히 서로의 재정 상태를 솔직히 드러내놓고 결혼식부터 신혼여행 그리고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보고 싶었기에 내가 제안한 데이트였다. 또 그 날 저녁 남자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 뵙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 일찍부터 계속된 긴장 상태에 있었다. 예식에 대한 문제는 둘 다 쉬운 합의점에 도달했다. 남들처럼 평범한 예식을 할 만 한 돈도 없었거니와 이미 한번 결.. 더보기
48시간_(3) 남자의 연봉은 사귈때부터 알았던 사실이었지만 남자의 월급에서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빠져나가는 돈의 액수를 정확히 들은 건 서로 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서로의 통장잔고를 공개하게 되면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고 이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당연히 좋지 않은 쪽으로. 양육비와 대출이자, 그리고 월세를 빼고 나자 나이 마흔 직장경력 12년차의 남자의 월급은 신입사원의 그것과 비슷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식에게 손을 벌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주유소와 식당에서 일거리를 찾아 어떻게든 언니와 나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시려는 내 부모님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남자네 집의 ‘가풍’은 낳아주고 길러줬으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노후를 의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남자도 이 ‘가풍’에 대해 아무런.. 더보기
48시간_(2) 돌아보면 우리처럼 절절한 만남, 연애, 사랑이 이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난 14개월 동안 남자와 인연을 맺어오면서 나는 내 생의 마지막 인연을 만났다고, 나는 남자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을 보고 영원을 꿈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순애보 일거라고 자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혼남 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이혼과 재혼, 비혼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이 존재하다지만 초혼인 여자가 애 둘 딸리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꿈꾸는 연애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와 포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즉, 남자는 매달 백만 원 이상의 양육비를 충실히 내고 있는, 앞으로도 충실히 비양육자의 의무를 이행할 것만 같은 두 아들의 책임감 있는 애비 모습을 포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 더보기
48시간_(1) 내 마음이 변했다. 요새 남자를 보면서 드는 감정이었다. 바로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 하루에 수차례씩 안부를 묻고 통화하는 건 여전했지만 밥 먹었어? 밥 챙겨 먹어야지 이런 살가운 대화의 끝은 항상 월세와 보증금, 생활비 얘기가 나오면서 소리 높여 싸우다가 어색한 화해로 끝이 났다. 앞으로 싸우지 말자, 응 싸워서 서로가 지치면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라고 대답하며 지쳐서 끝이 오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은 지 벌써 몇 주 째였다. 주말이면 평소처럼 데이트하며 남자와 밥을 먹다가도 까닭모를 서운함과 억울함이 울컥 하고 올라와서 울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거나 일부러 하품을 한 적도 있었다. 하루 종일 바빠서 점심도 놓쳤다며 순댓국에 깍두기 국물을 풀고 허겁지겁 숟가락을 뜨는 그의 모습에서 비심(悲心)..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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