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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시점

48시간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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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연봉은 사귈때부터 알았던 사실이었지만 남자의 월급에서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빠져나가는 돈의 액수를 정확히 들은 건 서로 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서로의 통장잔고를 공개하게 되면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고 이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당연히 좋지 않은 쪽으로. 양육비와 대출이자, 그리고 월세를 빼고 나자 나이 마흔 직장경력 12년차의 남자의 월급은 신입사원의 그것과 비슷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식에게 손을 벌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주유소와 식당에서 일거리를 찾아 어떻게든 언니와 나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시려는 내 부모님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남자네 집의 가풍은 낳아주고 길러줬으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노후를 의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남자도 이 가풍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뒤 또 철렁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마나 집에서 술을 마시며 계산기를 두드려 댔는지 모른다.

열다섯 평의 다세대 빌라에 살면서 은퇴 후 몇 번의 주식실패로 여유자금이 전혀 없으신 부모님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아들의 입장을 같은 자식으로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상식적으로 공감을 하되, 그 모든 부채와 예비시댁의 곤궁함을 내가 당연히 끌어안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내가 평소에 꿈꿨던 부자는 아니어도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붙잡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럼 나는 이 사람 옆에서 행복할까 라는 자문에 쉽게 그렇다는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것만큼 분명했다.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다. 삼십대 중반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늙어가는 딸을 보면서 엄마는 내가 708호 글라라 아줌마처럼, 20년 지기 계꾼의 노처녀 딸처럼 나이 마흔에 시집가서 쌍둥이 낳고 잘 살고 있다는 남의 자식 결혼 이야기에 반색하며 당신의 딸인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두고 있는 듯 했다. 명절 때 마다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을 때마다 특히 엄마가 옛날처럼 배 굶는 시절도 것도 아닌데 많이 재지 말고 너 위해주고 네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 만나서 재밌게 살라는 말을 하면서도 부자 시부모를 만나고 연하 남편을 만나서 시집 잘간 게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라는 얘기 또한 곁들이며 마냥 부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진짜? 시댁에서 아파트 해줬대? 라고 하면서 맞장구라도 쳤었겠지만 가난한 남자를 만난 다음부터는 엄마의 일상적인 하소연마저 불편해졌다. 속으로, 엄마 미안해, 엄마는 그런 사위 못봐요.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그러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나같이 물질에 태연한 채, 사랑 그 자체만을 보고 남자를 사랑하는 내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할 정도였다. 대한민국의 많은 2030세대가 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자식을 포기한다는데 누구보다 열악한 결혼조건을 뚫고 이렇게 사랑 하나 믿고 살아보겠다고 하는 우리가, 정확히 말하면 이런 내가 얼마나 멋있는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보아라 대한민국 여자들이여 하는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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