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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시점

내부고발자가 얻는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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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씨네큐브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러 갔습니다. 광화문 교보을 찾았던 게 오후 3시, 서점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왜 지하에 자리잡은 대형서점의 공기에 갑자기 질식할 것만 같아서 밖을 나가고 싶은데,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커피숍에 갈 수도 없고 해서 씨네큐브를 찾았어요.

한적한 게 아니라 아예 사람이 없더군요. 난생 처음 상영관에 홀로 앉아서 영화를 보았죠.

한줄 소감은 스토리를 재밌게 짰으나 좀 오글거리는 대사가 아쉬웠다 정도 입니다. 의외로 몇 번의 반전이 있고 뻔하지 않게 스토리를 짠 건 기대이상 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영어대사를 좀 유치하게 너무너무 한국스러운 발음으로  "유 아 뤙, 위아 그레잇" 이렇게 넣어서 감정의 흐름을 깰 필요가 있었나 싶었어요.응답하라 1988과 응답하라 1994년를 지난 1995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사무실에서의 흡연이 당연하고, 여자직원이 다방 커피를 나르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여주인공 셋이 페놀유출 사건 관련하여 내부고발자 같은 입장이 되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뭣이가 중한디, 정의가 중하지, 얼른 고발해버리고 정의 찾는게 옳은거 라고 당연히 생각 했을테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경험해 본만큼 사람은 판단하게 되고, 그 경험이 기분 좋고 따스한 경험이 아니라 한번 휘청이는 경험이 되면 이제 옳고 바른게 정답이라는 생각에서 다른 눈이 떠져요. 심지어 옳고 바른게 뭔지도 헷갈리게 되죠.

몇 년 전, 회사를 떠나면서 저는 채용비리사건의 증인으로 경찰서에 몇번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나름 지역 신문에도 나올 떠들썩한 뉴스였고, 전 회사에 사표를 낸 상태라 말 그대로 소신껏 진술할 수 있었죠. 경찰서에 세번 불려가고 법원에서도 전화를 받았죠. 총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이죠.

회사의 채용팀으로 있는 동안, 이건 아니다 싶었던 일들을 눈감고 지었어요. 윗선과 지역 공무원의 교묘한 유착과 딸자식의 채용청탁, 그것을 지시하는 회사 간부들, 거스르지 않고 했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눈 감고 했죠.

그리고 그러부터 반 년도 지나지 않아서 검찰의 압수수색 등 사건이 터진거죠.저는 지긋지긋한 월급쟁이 안하기로 작심 했던 터라 속죄하듯 훌훌 불어제끼려는데 친오빠가 가족톡으로 계속 뭐라고 하는 거에요.

- 너 생각없이 함부로 술술 불어대지 마. 검찰이 너 위해서 너 불렀겠냐? 지들한테 유리한 주장을 해줄거 같으니까 부르는거지. 생각하고 말해라. 걍 예, 아니오 거나 기억이 안난다 그정도로만 답해도 충분해.

뭐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그때 내 마음속에서 정의 라는게 좀 불타 올랐던거 같아요. 이번 기회에 채용 청탁한 놈 새끼들 다 벌받아야지. 멀쩡히 취업 준비하고 면접 보는 애들만 불쌍한거 아냐. 나는 제대로 말하겠어. 다 불어버리겠어. 라고 생각했죠. 뭐, 뭔가 스스로가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전직장 동료들을 죄다 잃었죠. 그리고 결과마저 피고 무혐의가 나왔어요. 나중에 건너 건너 들었습니다. 내가 회사에 억하심정이 있어서 혼자 쑈-한걸로.저랑 같이 채용비리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던 동료 팀장들은 채용 비리가 전혀 아니었던 걸로 진술하고 저 혼자 소위 또라이가 된거죠.

결국 진실은 나만 아는 걸로. 사건은 마무리가 되고 그 이후로는 내부고발, 성희롱, 같은 사건에서 고발자 입장에 선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피부로 압니다.이 기억을 안고 다시 과거로 간다면 저는 아마 절대 내부고발 같은건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예, 아니오가 아니라 아마 저는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로 일관 했을 수도 있지요.그래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보면서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스토리로 나쁜 놈들을 하나 둘씩 부셔 나갈 때, 그 너무 영화같은 전개에 저는 누구보다 여주인공 셋을 응원하면서 봤어요. 대리만족 하는 심정이랄까...

늙는다는 건 다 그런거 같아서 슬퍼요.적당히 눈 감고, 적당히 편함을 취하고, 좀 힘없고 약한 놈은 밟고, 있어보이는 자에게 비비고, 그러면서 콩고물을 받아 먹는 비루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벌써 나부터 몇 년 전의 나와는 또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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