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지적 작가시점

성당(교회)헌금의 기준

반응형

신심이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성경 말씀이 진실로 믿어지는 건 아니다. 죽음 뒤에 천국와 지옥에 대한 확신도 없다. 그러나 내가 오랜 냉담 후 "하느님 엎어졌습니다" 하고 엎어진 후 반 년 째 매주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이후는 단 하나다.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컨트롤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여태까지는 내 팔자, 내 복, 나의 사주팔자에 의지하면서 그렇게 토정비결을 보고, 점집을 찾아 다녔다. 좋은 점괘가 나오면 그대로 믿은 적도 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한없이 불안에 떨면서 불안해 한 적도 많다. 점쟁이들 마다 말은 다 달랐고, 좋다는 일이 이루어진 적도 없고, 나쁘다는 일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을 다시 찾게 된 이후로는 마음이 참 편해졌다. 

하느님을 매주 미사시간에 만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열심히 미사드리게 되면서 나는 평온을 찾았다. 복음과 구원,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성당을 다시 찾기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더이상 기복신앙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지는 않는다.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당장 내 인생에 좋은일이 생기게 해달라는 기도 보다는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는 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도록 나를 어여삐 여겨 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우리 부모님의 평화와 안위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편이다. 

성당을 다시 찾게 되면서 넘어야 할 첫번째 난관이 고해성사 였다면 그 다음이 이제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였다. 성당은 한국의 개신교와 다르게 십일조에 대한 부담감도 내가 헌금을 얼마나 내는지 공개가 되지도 않는다. 내가 냉담하는 기간 내내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했던 비난 중의 하나가 바로 헌금이었다. 저들은 헌금이 아깝지도 않나? 성당에 낼 돈으로 맛잇는 거나 사먹지.... 하면서 혀를 찾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당장 집도 없고, 월세에 허덕이고 있으면 수입도 일정하지 않은 가난뱅이다. 친구에게 커피 한잔을 사려고 해도 마음을 먹어야 하고,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서 3000원짜리 김밥이냐 4000원짜리 치즈김밥이냐를 고민하는 내 처지에 헌금이 여간 마음 무거운 숙제가 아닌 것이다. 

나는 불편한 헌금을 내고 싶지 않다. 한주간의 내가 잘 살았던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 "아깝다는 생각없이 감사할 수 있는 정도"가 얼마일까 생각해보고 만원으로 정했다.  요새 물가도 올랐고, 주말에 교외로 나가서 커피 한 잔만 사먹어도 5천원이 훌쩍 넘는 시대에, 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소금빵 정도의 간식을 사먹으며 책을 볼 수 있는 그 금액의 기준이 나에게는 만원이다. 

멘탈에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 내가 당분간 아깝다는 생각없이 기쁘고도 가뿐하게 낼 수 있는 금액... ... 천주교인 이유가 신자들이 헌금을 천원씩만 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성당은 헌금에 대해선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낼 수 있다는 뜻. 

명품백을 쫙 빼입고, 벤츠 타고나서 천원내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만원이 아깝다는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6-7천원짜리 커피를 별 고민 없이 사먹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좀 양심에 찔리는 일이니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