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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시점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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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면서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책 좀 많이 읽은 게 뭐 그리 자부할 일인가 싶지만 '독서'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권장되는 교양임에는 분명하기에 책을 많이 읽는 내가 뿌듯하기 그지 없었다.

뭐랄까. 성인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면서요? 저를 좀 보세요. 전 보통 사람들이랑 달라요. 엄청 많이 읽는 답니다.

뭐 이런, 어디가서 말하기는 남부끄럽지만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는, 스스로도 우쭐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장편 소설을 읽을 때면 정주행 하기 딱 좋은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짜릿했고, 재테크 관련 책을 읽을때는 나 역시 이 책 한편이면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것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통장 잔고는 전연 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에세이나 심리학 책 등을 부지런히 읽어나갔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게 에세이는 가볍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연애 에세이를 낸, 그러나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서 서운한 에세이 작가이긴 하지만 에세이는 가볍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가볍게 위로하는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1위로, 2위로 불티나듯 팔리는 걸 보면서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책을 읽다보면 이 문장은 비문인데? 하는 글귀도 너무 많고, 최근에 읽었던 어느 유명작가의 에세이 에서는 작가가 pc하다 라는 말을 책에서 두어번 남발하는 게 아닌가.  검색창에 입력해서 찾아본 결과... 세상에나 작가라는 사람이 'pc하다'라는 말을 올바른 국어인양 저렇게 남발해도 되는 건가... 하는 언짢은 마음마저 들어서 코웃음이 나왔다.

*참고로 pc하다(p.c는 political correctness즉, 정치적 올바름의 약자이고 PC하다'는 건 '옳고그름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으며, 그 고민의 결과로 생긴 한시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다' 라고 한다고 한다.

웃긴건, 인터넷에서 설사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처음 보는 말이었지만) 그걸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단어로 치환해서, 혹은 풀어서 쓰는 노력없이 pc해, pc안해 이런 말로 쓰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 기가 막혔다. 이 에세이를 읽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 같은 보통 수준의 한국 사람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요새 나온 에세이 라는게 과연 소장가치가 있는 책인가. 아니 읽을 가치가 읽는 책인가. 에세이를 대체 왜 돈주고 사서 읽는거지 라는 의문을 어떻게 해소하지도 못했다.  에세이 에서는 그 어떤 문장력이나 삶에 대한 통창력 따위는 바라면 안되고 그저 유행을 타듯 소비되는 책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다가 최근 박완서님의 에세이를 읽게 됐다.

 

22년 6월에 나온 박완서님의 산문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손에 쥐었다.  그녀가 생전에 쓴 산문 35편을 담았다고 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읽어나가다가 가슴이 철렁 했다.

문장을 곱씹으며 모르는 단어는 국어사전을 일일히 찾아서 다시 단어장에 적어가며 (이 책 덕분에 단어장을 만들었다)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일상에서 잡아내는 그녀의 통찰력과 문장력이 상당하다. 나도 작가님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아 역시 사후에도 추앙받는 작가는 다르구나... 그런 경험에서 이런 생각을 뽑아내는 구나 싶어서 숨이 헉- 할 지경이었다.

모든 문장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내가 생각한 그렇고 그런, 이쁜 표지와 일러스트레이터에 반짝 떴다가 사라지는 책이 아니다. 3장에 한 번 꼴로 국어사전을 뒤적였다. 이런 한자어가 있구나, 이런 순우리말이 있구나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대충 10살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고 치면, 30년이 되어서야 왜 에세이를 읽는지, 왜 박완서, 박경리 같은 작가를 추모하고, 문학관을 따로 만들어서 기리는지 이제야 안다. 에세이를 읽는 속도에 나도 모르게 가속도가 붙자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속도를 늦추게 됐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 뿐이다.

박완서님의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저는 글이 쓰고 싶어요' 라고 입버릇 처럼 떠들었떤 걸 반성한다. 나는 단어 실력도 현저히 부족하고, 일상의 한 컷을 붙잡고 앵글을 달리해서 바라보는 남다른 감수성도 없지 않은가.

이 책 덕분에 국어를 다시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어쩌면 나는 책을 헛 읽어왔던 것 같다. 예쁜 우리말을 찾아가면서, 국어의 다양한 말맛을 곱씹어가면서 읽고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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