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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시점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 (a.k.a 오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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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세월호 이후로 다시는 이런 참사를 내 생애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이 커서가 아니었다. 안됐고 무섭고 슬프고 화가난 건 당영한 건데, 난 그 감정을 넘어서서 일상을 제대로 유지하며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때 그랬다. 희생자들은 한두 다리쯤 건너서 아시는 분의 자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그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의 속보를 계속 들으면서 내 인생이 허무해졌다. 

'살아서 무엇하나...'싶은 무기력한 감정에서 몇달 간 벗어나오기 힘들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8년이 흘렀고 믿을 수 없는 이태원 압사 사건이 일어났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겠지만 아이러니 하게 또 보수정권에서 이런 인재들이 발생한다. 

토요일 밤, 나는 모처럼 몇년 만에 지인을 만나서 미사리와 하남에서 익어가는 가을을 만끽했다. 너무너무 좋다며, 오늘 나오길 참 잘했다며, 역시 10월의 마지막이 가을의 절정이라며 그렇게나 사진을 찍어댔다. 커리어, 노화, (언제나 그랬듯이) 돈 문제, 부모님 걱정 등등 뭐 어떻게 당장 어찌할 수도 없는 수만가지 걱정들을 떡볶이에 수다에 날리며 나는 지인과 헤어졌다. 

그리고 운전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로 이태원 앞이 극심한 정체라는 얘기를 흘려들었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이태원 앞? 아 오늘이 할로윈인가. 역시 어린 게 좋다.' 싶었다. 2002년 월드컵, 내가 스무살 때 시청앞에서 온갖 월드컵 코스프레를 하며 대한민국을 외쳤던 것처럼, "요새 애들"은 이태원에서 젊음을 만끽하겠구나 싶어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이태원 쪽을 피해서 운전해서 집으로 왔다. 집에서 씻고 자는데 새벽에 전화가 들어왔다. 잠결에 받으니 엄마였다. 엄마는 내 목소리가 잠결이라는 걸 알고 '아니~ 이태원에 난리가 났다길래... 일단 얼른자라' 라는 통화음을 대충 무시하면서 응~ 이러고 나는 마저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다음 일요일에 느지막히 일어났더니 뉴스와 유튜브 짤로 이태원 압사 속보와 사진 동영상이 떠도는 걸 보고 다시 몇번이고 울컥하다가 다시 마음이 불안하고 어지러워졌다. 너무 덧없어서. 울컥하는 마음에 막 눈물이 차올랐다가 피식 웃음이 나올만큼 덧 없어서 멘탈이 오락가락 한다. 사람들의 표정, 누워있는 시신, 할로윈 복장, 좀비 복장으로 야광봉을 흔드는 사람들, 그 와중에 옆골목에서는 떼창을 하는 사람들...너무나 기괴하고 오싹해서 마치 산 지옥이 눈 앞에서 펼쳐진 느낌이었다. 

내가 했던 수많은 미래 걱정, 신세한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대수로 살자. 사실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20대 전유물이 아니라 내가 죽을때까지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 일지도 모른다. 삶은 유한한데 죽을 때와 죽는 방식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루하루 대충 살면서 후회없는 인생을 살지어다. 

고인에게 명복은 당연하고, 2022년 10월 29일 그 지옥같았던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모든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지 않고 모두 안녕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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