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기간이 해마다 길어질수록 가을의 초입은 귀해진다. 2025년 여름 역시 혹독했다. ‘난 손발이 차니까 아무리 더워도 여름이 좋아’ 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여름이 힘 겨운 만큼 가을이 반갑고, 짧아진 기간만큼 가을은 소중하다.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 역시 가을의 초입일까. 인생의 가을에 막 들어선 알싸한 기분을 쓸 어내리며 가을날을 꼼꼼히 곱씹어 본다. 아쉬운 가을을 붙잡고자 이번 가을은 누런 논두렁을 많이 보러 다녔다. 노을지는 오션뷰가 사 람의 마음을 황망하게 만드는 허무의 매력이 있다면 논밭에 출렁이는 황금빛의 논뷰는 나의 마음을 묵직하게 채우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지난 주, 거제도 둔덕마을에 다녀왔다.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라는 말에 한달음에 서울 에서 6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내려간 곳이었다. 사람도 자동차도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논두렁가에 차를 세우고 고개숙인 벼를 가만히 바라 보다가 논두렁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고개를 숙인 벼는 바람에 쓸려내려간 곳도 있었고, 누런 논 벼 사이사이로 관리가 안된 잡초 가 무성하게 자란 곳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있는 그대로 장관이었고 동서남북 시야 가 닿는 모든 곳에 가을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나는 올해를 어떻게 보냈는가. 바야흐로 10월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었다. 일, 사랑, 개인적인 성취를 돌이켜보니 크고작은 후회들이 하나둘씩 남는다. 열심히 일했지만 수익은 기대만큼 좋지 못했고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 사랑은 안정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영원한 난제이자 좀 더 성숙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겨 주었다. 몸짱은 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요가하는 습관을 들였기에 반쪽짜리 성공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도 유튜 브하면 초대박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채널을 만들고 영상을 꾸준히 올리고 있지만 10만 구독 자는커녕 100명도 되지 않아서 씁쓸함을 맛보고 있는 중 아닌가. 눈이 시릴 만큼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둔덕 마을의 벌판에 서서 올 한해 나의 흔적을 이렇게 찾는다. 무겁게 그러나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고개를 숙인 예쁜 벼는 꽤 마음에 들었던 올 해의 나의 모습이다. 무리해서 구순의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린 나, 엄마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손 등에 내려앉은 검버섯을 보고 참은 나, 저축하기도 빠듯하지만 빚 없이 개인 사업체를 이 끌어 온 나는 분명 예쁜 벼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하릴없이 쓰러진 벼무덤은 상처받고 좌절 하고 나의 마음과도 꼭 닮아 있었다. 빼곡한 벼 사이에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하게 뻗어 있는 모습은 올해 시작만 하고 끝을 맺지 못한 의지가 약한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외국어 공부하기, 다이어트 성공해서 크롭티 입기 등등 작심삼일로 끝난 나의 모습이 떠올라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중에 가을만이 유일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보게 한 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계절보다 가을이 좋다. 가을이 좋은 또다른 점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거. 아직 우리에게는 겨울이 남아 있다는 거. 돌아보고 반성과 후회만 하 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기간이 조금 더 있다는 점이다. 두어달이 더 남았다. 가을에게 조금만 시간을 멈추어 달라고 사정하면서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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